3.1 운동 100주년 기념 특집 – 3.1운동 세계 독립 운동에 불을 붙이다!
주니어 앰배서더 여러분, 안녕하세요. 내일은 대한민국 역사의 흐름을 크게 바꾼 사건인 3.1운동이 100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일제의 강제침략에 항거하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한국의 독립 의사를 세계 만방에 알린 독립투사들을 기억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기념행사들이 열리고 있는데요. 전화도 인터넷도 없던 시대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3.1운동은 우리만의 역사가 아닌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세계인의 역사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주니어 앰배서더는 3.1운동의 세계사적 의의를 살펴보며 그 정신을 기려보고자 합니다.
▲ 사진출처 : 뉴욕타임스
칼은 펜을 이길 수 없다! 신문을 통해 세계로 퍼져나간 3.1운동의 정신
인터넷도 전화도 없던 시대지만 한국에 머무르고 있던 외국인들의 펜을 통해서 조선의 3.1운동은 전 세계에 알려졌고 비폭력저항운동을 확산시킨 계기가 되었습니다. 3뉴욕타임즈는 1919년 3월 13일자에서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알려진 것 이상으로 3·1운동이 널리 퍼져나갔으며 수천여명의 시위자가 체포됐다”고 기록했고요. AP통신은 “독립선언문에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2000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있다’고 명시돼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밖에 프랑스의 앙탕트 신문, 영국의 모닝포스트 같은 주요 일간지에서부터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지역신문 이그재미너, 중국 상해의 민국일보 등 작은 매체들까지 조선에서 벌어진 3.1운동을 소개하는 기사를 연달아 보도하며 3.1운동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3.1 운동이 알려지자 식민통치에 신음하고 있던 다른 식민지 국가들에서도 3.1 운동의 영향을 받은 민족독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일본의 침략을 막고 현대중국의 기틀이 된 중국의 5.4운동
현대 중국 탄생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중국의 5.4운동이 대표적입니다. 19세기 말, 중국을 점령하려고 눈독 들이던 유럽 열강들은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중국에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요. 그 사이 일본은 산둥반도를 점령하려고 21개조 요구(1915년) 등으로 중국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습니다. 이에 반대한 북경대학 학생 3천여명이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1919년 5월 사일 천안문광장에서 중국 대표가 ‘파리강화조약’ 주권 포기에 서명하는 것을 반대하는 운동을 펼치며 시작되었는데요. 주요 도시의 노동자 학생 상인들도 모두 동맹파업을 하면서 대규모의 항의시위 운동을 전개했고, 정부는 파리강화조약 서명을 거절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가난한 민중이 함께 참여해 성공한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혁명운동 5.4운동은 중국공산당을 창립시키며 현대 중국의 기틀이 됩니다.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3.1운동의 비폭력 저항 정신, 인도 독립의 불빛을 밝히다
“1919년 자유를 되찾기 위해 싸우는 조선민족의 조직체가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일본인에 반항했다. 그들은 수없이 죽어갔고, 수없이 일본경찰에 구속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들은 이와 같이 그들이 이상을 위해 희생하고 순국했다. 조선에서 평범한 학생, 또는 젊은 여성과 소녀가 투쟁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을 듣는다면 너도 틀림없이 감동을 받을 것이다.” 인도의 첫 총리이자 독립운동가인 지와할랄 네루가 독립운동 기간 중 딸인 인디라에게 적은 편지의 내용입니다. 종교인을 주축으로 추진되어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3대 원칙을 바탕으로 진행된 조선의 3.1운동은 이처럼 널리 알려져 인도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남아프리카에 머무르던 간디는 3.1운동을 신문에서 읽고 급히 귀국하여 1919년 4월부터 시작된 인도 국민회의파의 비폭력 독립운동(사타야그라하)를 주도했는데요. 불교와 힌두교 전통으로 폭력을 싫어하는 인도 대중에게 독립운동이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조선의 독립의지, 각국 독립운동의 계기가 되다!
3.1운동을 계기로 조선의 독립의지에 대한 세계의 인식도 달라지게 됩니다. 경술국치 이후 세계에는 조선인들이 일제에 순응한다는 인식이 많았으나 3.1 운동 이후 정작 자신들이 행동하지 못함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의 대학생들은 1919년 6월 독립운동을 일으켰고, 영국 식민지였던 이집트의 카이로 대학생들도 같은 달 독립운동을 일으켜 아랍 세계 전체가 독립운동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세계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만들어진 세력들은 그대로 성정하여 2차대전이 끝나고 독립국가를 재건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3.1운동이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된 것처럼요.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국가보훈처가 선정한 외국인 독립운동가가 있다?
3.1운동이 영향을 미친 것은 당시 해외에 있던 외국인들만이 아닙니다. 2016년 3월, 국가보훈처는 3.1운동을 함께 준비하고 만세시위를 하는 사진을 찍어 기사와 함께 해외에 알린 캐나다인 스코필드를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한 바 있습니다. 현재도 서울시청에서는 조금 독특한 3.1절 기념전시회가 개최되고 있답니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쓴 캐나다들을 기리는 전시회입니다. 의사로 선교사로 기자로, 다양한 이유로 조선을 찾은 세계인들은 목숨을 바쳐 대한독립에 힘을 더했습니다.
고종황제의 외교특사, 호머 헐버트
1986년 선교사로 한국을 찾은 헐버트 박사는 고종에게 한글 띄어쓰기를 건의하고, 최초의 한글교과서 <사민필지> 및 단군부터 고종까지를 아우른 역사책 <한국사>를 집필한 한국학의 개척자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강제로 박탈하자 한국의 자주독립을 주장하여,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미국에 돌아가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면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1907년에는 고종에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내도록 건의했고, 스스로 밀사보다 먼저 건너가 만국평화회의 신문에 한국 대표단의 호소문을 싣는 등 한국의 국권 회복운동을 적극적으로 돕다가 일본에 의해 강제추방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도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 사진출처 :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친 어니스트 베델
영국인 어니스트 베델은 1904년 영국신문사 <Daily Mail>의 특파원으로 한국을 찾았으며 서울신문의 전신인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외국인인 어니스트 베델을 발행인으로 내세워, 일본인 검열관의 사전 검열을 피할 수 있어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고, 고종의 친서를 게재하는 등 여러 중요한 소식들을 민중에게 전했습니다. 어니스트 베델은 일본인 배척을 선동한 이유로 영국상해고등법원에 제소되었습니다. 베델은 재판 과정에서 건강을 해치는 바람에 37세에 사망하였으며, “내가 죽더라도 신문은 살려 한국을 구하게 해야 한다.”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 사진출처 : 국가보훈처
조선인 인권 보호에 앞장선 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쓰지
일본인이지만 조선 민중을 변호했던 일본인 인권 변호사 후세 다쓰지도 있습니다. 박열, 궁성 폭탄투척사건의 김지섭, 의열단원 김시현을 무료로 변호한 후세는 독립운동가 변호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권리를 위해서도 애썼습니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수탈로 고통 받는 나주 농민들의 모습을 보고 일본을 상대로 토지 소송을 제기했으며, 관동대지진으로 요동치는 일본의 민심을 잠재우기 위한 조선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자, 후세 다쯔지는 일본을 대신해 사과문을 작성해 조선의 신문사에 보내기도 합니다. 이런 행적으로 인해 그는 1932년에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지만 억압받는 조선인을 위해 평생을 보냈으며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해방되자 “조선인들의 독립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 날은 나에게도 자유의 날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 사진출처 : 국가보훈처
3.1운동은 제국주의에 맞선 인류 전체의 역사입니다
자기에게 피해를 주는 문제도 아니고, 자기 나라가 관련된 문제도 아닌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 외국인 독립운동가들의 행동은 일반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이 목숨을 걸고 조선의 독립을 지지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작은 나라 조선의 3·1운동이 당시 세계의 마음을 울리고’세계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친 이유는 무엇일까요?
강한 자는 약한 자를 이용해도 된다는 차별적 논리를 국가 단위로 확장해 정당성을 부여한 제국주의에 맞서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보편적 인권을 지키고, 세계의 평화를 열망했던 인류애 때문이 아닐까요? 3.1운동이 영향을 끼친, 그리고 3.1운동에 영향을 준 ‘세계시민’ 정신의 기반은 이처럼 인류 공동의 문제에 대응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겠지요. 세계가 갈수록 긴밀해지고, 이런 긴밀함 속에 글로벌 시티즌십이 중요해지는 오늘날 100주년을 맞이한 3.1운동이 빛나는 또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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