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건물이 다시 살아나다, 폐허를 랜드마크로 바꾸는 ‘재생건축’
주니어 앰배서더 여러분은 혹시 ‘재생건축’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건물이 노후화 되고 본래의 목적을 수행할 수 없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 건물은 철거의 수순을 받게 됩니다. 오래된 기차역이 사라지듯이 건물에도 수명이 있고, 그 수명을 다 하면 ‘죽은 건물’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죽은 건물’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바로 ‘재생 건축’입니다. 재생 건축이란 과거 건축물의 정체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운형, 또는 그 일부를 디자인 요소로 살려 새로운 기능과 용도의 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을 말하는데요, 낡은 건물에 숨결을 불어넣고 그 건물이 품었던 유·무형의 사회적, 역사적 의미를 후대에 이어준다는 점에서 각광 받고 있는 건축 기법이기도 합니다.
이 재생 건축은 산업의 발생지였던 유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유럽 사람들은 1차 산업혁명, 2차 산업혁명, 3차 산업혁명을 거치며 쓸모 없어진 건물을 부수는 대신 그 정체성을 간직한 새로운 공간으로 재탄생 시킨 것이지요. 재생 건축과 관련된 건물이 유럽에 유난히 많은 것도 이러한 이유인데요, 오늘 앰배서더 통신에서는 폐허가 된 건물과 공간에 새 생명을 불어넣고, 그 역사와 의미를 되새기며 랜드마크로 거듭난 재생 건축물의 사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사진출처 : Michael Doring
1. 기차역에서 미술관으로 – 오르셰 미술관 (Orsay Museum)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를 위해 프랑스 파리 한 가운데 세워졌던 오르셰 기차 역. 오르셰 기차 역은 호텔, 레스토랑 등의 부대 시설을 포함한 초호화 기차역이었는데요, 이후 철도가 빠르게 발전하고 새로 개발된 열차와 플랫폼의 규격이 맞지 않게 되면서 1939년 부터 오르셰 기차 역의 장거리 열차의 운행이 중지되었습니다. 기차의 운행이 중단되자 점차 쇠퇴하던 오르셰역은 1973년 호텔마저 영업을 종료하면서 결국 문을 닫게됩니다. 철거 위기에 놓였던 오르셰 역이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은 루브르 박물관 책임자들 사이에서 미술관으로 개축하자는 제안이 나오면서였습니다. 1978년 오르셰 미술관 건립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1979년 건축안 공모전을 거쳐 1986년 마침내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 후로 현재 30년 가량의 세월이 지났는데요 현재 오르셰 미술관은 루브르 박물관과 더불어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방문하는 파리의 명소가 되었습니다. 만약 쓸모 없어진 기차 역을 그대로 허물어 버렸다면, 지금 오르셰 미술관의 독특한 컨셉도, 그 속에 담긴 이야기도 모두 묻혀버리지 않았을까요?
▲ 사진출처 : freepik
2. 감옥이 호텔이 되다! – 카타야노카 호텔 (Katajanokka Hotel)
1837년에 건립된 핀란드 헬싱키의 ‘카타야노카 감옥’. 1837년 처음 완공되고 이후 차르 니콜라스 3세에 의해 기존 감옥에서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을 세면에 각각 연결하는 방식으로 대규모 확장이 이루어져 총 164개의 감방을 보유하게 된 이곳은 강도, 살인자 등의 범죄자 뿐 아니라 사상범, 정치인들도 수감됐던 핀란드의 역사적 유물이었습니다. 카타야노카 감옥은 ‘필라델피아 스타일’로 불리는 근대식 감옥의 내부 구조를 적용했고, 감옥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중앙 난방 시스템을 채용하는 등 건축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있는 건물이었는데요,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감옥의 환경이 점차 낙후되었고 정부는 이곳을 개선하기 보다 새로운 감옥을 짓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바꾸어 2002년에는 모든 수감자가 새로운 감옥으로 이전,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카타야노카 감옥은 결국 문을 닫게 됩니다. 역사적으로나 건축적으로나 충분히 보존할만한 유산으로 인정받은 카타야노카 감옥이지만, 높은 담장과 철조망으로 굳게 닫힌 감옥과 그 주변 풍경은 결국 전문가와 시민들 사이에 불만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건축물이라고 해도, 좋지 않은 분위기를 생성하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요. 감옥을 헐고 새로운 건물을 짓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의견이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감옥의 위치나 주변 환경 조건으로 판단할 때 다양한 형식의 재개발이 충분히 가능했기 때문에 그러한 여론은 더욱 힘을 얻었습니다.
▲ 사진출처 : MUSSEL
이 무렵 세계 최대 규모의 미국 호텔 체인인 ‘베스트 웨스턴’이 카타야노카 감옥에 큰 관심을 보이게 되었는데요, 베스트 웨스턴은 핀란드 정부에 문을 닫은 카타야노카 감옥을 헐고 새 건물을 짓는 대신 기존 건물과 공간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호텔 기능을 접목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했습니다. 헬싱키 시의 입장에서는 골칫덩어리 건물을 재활용함과 동시에 지역 경제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기에 기꺼이 환영할만한 일이었지요. 건물 외관은 거의 손을 보지 않는 조건으로 베스트 웨스턴은 내부의 보수와 인테리어에 중점을 둬 카타야노카 감옥을 호텔로 리노베이션 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07년 5월 ‘베스트 웨스턴 프리미어 카타야노카 호텔’이 새롭게 문을 열게 됩니다. 기존 감옥의 원형과 분위기를 최대한 유지하는 것을 핵심 원칙으로 삼아 진행된 리노베이션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고, 감옥으로서는 어쩌면 적절하지 못한 위치에 존재했던 카타야노카 감옥이 호텔로 변신하고 나니 주변 조건이 커다란 장점으로 살아나 이제는 카타야노카 호텔이 된 카타야노카 감옥은 재생건축의 대표 사례로 꼽히며 과거의 역사를 간직한 채 새로운 역사를 써 나가고 있습니다.
3. 뉴욕 명물이 된 죽음의 거리 – 하이라인 파크 (HighLine Park)
1847년, 뉴욕은 화물운송을 위해 땅 위에 철로를 깔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뉴욕 시내는 말과 마차,증기차, 사람, 자전거가 뒤엉켜 다니던 혼란스런 곳이었는데요, 그 가운데 놓인 철로는 혼란을 더 부채질 하기만 했습니다. 열차와 다른 차량이 교차하는 10번가는 너무 많은 부상자와 사망자가 생겨 ‘죽음의 거리’라는 악명을 얻을 정도였지요. 1929년 뉴욕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놀라운 아이디어를 제시하였는데요, 바로 땅에서 높이 떠 있는 공중철로를 깔자는 것이었습니다.1억 5000만 달러라는 거금이 필요한 프로젝트였죠, 2009년 기준 20억 달러(2조 900억 원)짜리 건설 공사였습니다. 1934년 개통된 공중철도는 오로지 화물을 편리하게 옮기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건물 한가운데를 철로가 통과하는 형태로 만들어지게 되었는데요, 시내 쪽 교통 정체를 피하면서 화물운송을 편리하게 만든 기발한 구조였지만, 이 계획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철도 교통보다 더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더 빠른 운송방식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지요. 1944년 미국 의회는 주와 주를 잇는 고속도로망 건설을 계획하고 여러 주에 고속도로를 깔기 시작하면서 화물트럭운송이 눈에 띄게 발전했습니다. 발대로 철도 운송은 내리막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결국 1960년대 철도운송이 줄면서 뉴욕 고가철도 남쪽 절반이 철거됩니다. 그 후 1980년 마지막 운송을 끝내고 운영사인 콘레일(Conrail)은 고가철도를 뉴욕시에 기부하였습니다. 그 후 약 20년동안 고가철도는 도시의 흉물로 방치되게 되었죠.
▲ 사진출처 : ioevare
풀이 무성히 자라고 야생 동물이 자리잡아 도시의 흉물이 된 고가철도를 철거하라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점차 높아졌습니다. 1999년 뉴욕시장인 루돌프 줄리아니는 철거 요구를 수용했고, 고가철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1999년 ‘하이라인의 친구들'(Friends of the highLine)이란 단체가 만들어지면서 분위기가 변합니다. 단체는 철로를 보존하면서 공원으로 만들고자 하였는데요, 1993년 프랑스 파리에서 선보인 프로머나드 플랑테(Promenade Plantee)를 모델로 삼은 것이지요. 오랫동안 방치된 화물열차 이동로를 새로 꾸며 도시산책로로 만든 공중 정원이 바로 프로머나드 플랑테였습니다. 그리고 줄리아니의 후임으로 마이클 블룸버그가 뉴욕시의 새로운 시장으로 뽑힌 이후, ‘하이라인의 친구들’의 설득으로 새로운 뉴욕 시장이 고가철도를 공원으로 만드는데 5000만 달러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고, 이는 도시의 흉물이었던 고가철도가 다시태어나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2006년 착공식을 거행해 2009년 첫 번째 구간이 문을 연 지금, 하이라인 파크는 뉴욕의 명물로 자리잡았습니다. 죽음의 거리였던, 도시의 흉물이었던 곳이 지금은 뉴욕시의 명물이 된 것입니다.
4. 식민지관문에서 복합문화공간으로의 변신 – 문화역서울 284
마지막으로 소개해드릴 재생건축 사례는 우리나라의 서울역입니다. 1925년 문을 연 옛 서울역사는 80년 가까이 서울의 관문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기차역이었는데요, 이후 한국 전쟁에서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지만 2003년 새로운 서울역사가 건설될 때까지 옛 서울역사는 수많은 열차의 출발점이자 도착점이었습니다.
스위스 루체른 역을 모델로 삼은 이 서울역 건물은 사실 일본 식민지의 관문이었습니다. 일제는 서울역을 일본과 조선, 만주를 잇는 ‘국제역’으로 기획했는데요, 도쿄에서 출발한 일본 국철이 시모노세키에 이른 후 부관연락선으로 갈아타 부산에 닿고, 다시 기차에 올라 서울역을 거쳐 만주와 시리아, 더 나아가서는 모스크바와 베를린까지 연결하려는 구상이었죠. 이에 따라 서울역을 건설한 주체는 남만주철도주식회사였고 ‘만철’이라는 약칭으로 불리던 이 회사는 마치 영국의 동인도회사처럼 식민지 경영을 위한 제국주의의 첨병이었습니다. 식민지 수탈을 위해 인도 전역에 철도를 깐 영국처럼, 일본도 만주의 식민 경영을 위해 철도를 중심 산업으로 채택한 것입니다. 건축 당시 1층에는 매표소를 겸하는 중앙홀, 주로 조선인들이 사용했던 3등 대합실, 일본인들이 이용한 1, 2등 대합실과 부인대합실, 귀빈실, 역장실 등이 있었습니다. 3등 대합실은 남녀가 함께 이용했지만 1,2등 승객은 부부라도 남녀를 구별해 여성은 부인대합실에 따로 머물러야했지요. 2층에는 당시 최고의 서양식 레스토랑인 ‘서울역 그릴’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상의 소설에도 등장하는 이곳은 모던보이와 모던걸의 집합소로 사용되었죠.
▲ 사진출처 : Jinho Jung
일제 식민지의 잔재라고도 할 수 있는 서울역이 원형 복원 공사를 마친 후 새롭게 다시 태어난 것은 2011년의 일입니다. ‘문화역서울 284’라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서울역은 역사(驛舍)로서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전시를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행사가 개최되는 장소로 변화했습니다.
문화역서울 284는 RTO 공연장과 이어져있습니다. RTO 공연장은 원래 수하물도장과 지하층의 화물창고를 연결하는 목재 원형 계단이 있던 자리였는데요, 지금은 그 이름을 그대로 물려받은 공연장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RTO 공연장 앞에는 첨단 복합문화시설과 어울리지 않는 한복 두루마기를 입은 인물의 동상이 자리잡고 있는데요,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9월 2일, 3·1 운동의 여파로 새로 부임해온 일본인 조선총독 사이코 마코토를 죽이려고 서울역에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 강우규 의사의 동상입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서울 역사는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하여 우리에게 과거의 기억들을 잊지 않게 해주는 매개체로서 그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역사를 이어가는 낡은 창조
영국 런던에는 오래된 건물들이 많습니다. 낡은 건물을 허물어버리고 새로운 건물, 더 높은 빌딩을 지어올린 서울의 풍경과는 다르게 유럽인들은 낡은 건축물의 가치를 인정하고 고쳐서 쓰는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때로는 낡은 건물을 고쳐서 쓰는 것이 새로 짓는 것보다 더 많은 수고로움과 돈을 필요로 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생 건축이 각광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오래된 건물에는 그 건물 나름의 역사와 스토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옛것이 무조건 좋은 것도, 새로운 것이 무조건 나쁜 것도 아니지만 옛 것을 되살려 역사와 추억이 공존하는 새로운 공간을 탄생시키는 ‘재생 건축’은 분명 의미가 있는 작업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