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좀 읽어라’라는 말이 뻔한 잔소리가 아닌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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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니어앰배서더 #주니어앰버서더
TL;DR을 아시나요?
미국 청소년들 유행어 중에는 ‘TL ; DR(Too Long ; Didin't Read)’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너무 길어 읽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지하철, 카페, 식당 어디서든 디지털 매체를 통해 영상을 보거나 훑어보거나 건너뛰는 방식으로 글자를 읽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는 시대인데요. 스마트폰을 들여다본 채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는 반면, 너무 길어서 읽지 않았다는 유행어까지 생겨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10년 전만 해도 지하철이나 버스 가판대에서 빈번히 볼 수 있던 종이 신문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종이책은 더더욱 찾기 힘들어졌습니다. 한국인 10명 중 8명은 이제 모바일로 기사를 접하고 있으며, 또 10명 중 4명은 1년에 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는다는 연구가 있었습니다.
뇌의 가소성(可塑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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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수천 년 동안 구술 문화 시대에서 문자 문화 시대를 거쳐 구텐베르크 이후 시대로 넘어왔습니다. 뇌 역시 이 과정에서 학습과 훈련을 통해 ‘읽는 뇌’로 진화되었습니다. 뇌가 읽기에 최적화된 형태로 회로가 바뀌고, 배선과 그 구조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영상매체와 스마트폰의 발달로 뇌는 다시금 변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인지학자들은 오늘날을 ‘읽는 뇌’에서 ‘보는 뇌’로의 전환의 시기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읽기’가 인류의 뇌에 유전되는 습관이 아니라 사람이 태어나 자라면서 생겨나는 훈련의 결과라는 점입니다. 한번 디지털 읽기에 최적화된 뇌 회로는 좀처럼 예전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요. 이런 성질을 ‘가소성’이라고 부릅니다. 엄청난 정보는 새것과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대신 주의집중과 깊이 있는 사고를 인류에게서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F자 읽기, 인류가 글자를 읽는 방식이 변하고 있다!
인지학자들은 디지털 읽기가 확산되면서 인류의 읽기 패턴도 바뀔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습니다. 글을 얼마나 잘 읽는지는 얼마나 깊이 읽는지에 달렸는데, 디지털 매체의 특성상 집중하기가 어렵고 결국 ‘깊이 읽기’가 어려워질 확률이 크다는 우려입니다.
디지털 읽기는 종이책 읽기와 읽는 방식부터 다릅니다. 디지털 읽기의 표준은 ‘훑어보기’입니다. 스크린으로 읽을 때 우리는 지그재그나 F자형으로 텍스트를 재빨리 훑어 맥락부터 파악한 후 결론으로 직행합니다. 미국의 웹 페이지 디자인 컨설턴트인 제이콥 닐슨이 2006년 인터넷 사용자들에 대한 시선을 추적한 적이 있습니다. 실험참가자 대부분의 시선은 전형적인 책읽기 방식인 한줄 한줄 진행하는 방식이 아닌 재빨리 훑는 방식으로 페이지 아래를 향해 건너뛰듯 내려가는 식으로 진행된다고 합니다. 한 페이지를 보는데 투자한 시간은 평균 4.4초였는데요. 아무리 훌륭한 읽기 능력을 갖고 있는 이들도 4.4초 동안 읽을 수 있는 단어가 18개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온라인 읽기는 ‘읽기’가 아니라 ‘보기’에 가깝습니다.
읽기의 결과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노르웨이 학자 안네 망겐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그룹은 전자책, 한 그룹은 종이책으로 짤막한 프랑스 연애소설을 읽히는 실험을 했는데요. 전자책으로 읽은 그룹은 종이책으로 읽은 그룹에 비해 소설의 세부적인 줄거리나 논리 구조 파악에 약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훑어보기’를 할 때 우리의 뇌는 정보의 통합에 있어 덜 직접적이고 더 피상적으로 관여하게 됩니다. 이런 읽기는 장기 기억으로 전환되지 못해 지식으로 쌓이기보다는, ‘아 그렇구나’라는 감상과 함께 망각의 영역 속으로 사라져버립니다.
이런 F자형 읽기는 디지털로 기사를 읽은 뒤 댓글을 읽거나 댓글을 달 때에도 도드라집니다. 최근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자사 이용자들의 아이디와 댓글을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댓글을 많이 다는 사람들은 정작 기사 본문을 많이 읽지 않는 경향이 두드러졌다고 합니다. 제목만 읽거나 기사 일부만 보고 바로 댓글을 다는 경우가 적지 않고, 댓글에도 자신의 고유한 생각을 쓰는 대신 다른 사람의 댓글에 집중적으로 의견을 달거나 상대를 비방하는 식으로 전체 관점의 사고를 하지 않고 한 문장, 혹은 한 문단에 집착하는 좁은 사고를 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디지털 기기를 버리고, 무조건 책을 들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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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디지털 기기를 버리고 무조건 종이책을 들어야 하는 걸까요? 읽기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 디지털 세대에게 미국의 인지학자 매리언 울프는 <다시, 책으로>라는 책을 통해 ‘양손잡이 읽기 뇌’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안합니다. 필요한 정보를 쉽고, 빠르게 검색하는 디지털 특화 읽기 방식과 창의적 사고와 깊이 있는 사유를 가능케 할 인쇄물 기반 읽기 교육이 어릴적부터 병행되어야 매체마다 다른 읽는 속도와 리듬, 습관을 형성할 수 있게 된다는 주장입니다.
또한 뇌의 가소성을 줄이기 위해 ‘건성 읽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매리언 울프는 종이책 읽기를 권합니다. 종이책으로 읽은 학생들이 스크린으로 읽은 학생들보다 줄거리를 재구성하는 능력에서 더 뛰어나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 성인은 종이책 읽을 때 구축된 깊이 읽기 회로를 되살릴 수 있을 것이고, 어린이는 디지털 기기를 가급적 멀리하고 어릴 때부터 종이책 읽기를 권해 깊이 읽기 회로를 형성토록 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날 인류는 그 어느때보다 많은 것들을 읽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국의 한 연구에 따르면 한 사람이 매일 다양한 기기를 통해 소비하는 정보의 양은 평균 약 34기가바이트, 10만개의 영어 단어에 가까운 양입니다. 이렇게 많은 정보를 언제든 얻을 수 있는 지금, 우리의 뇌가 이 정보들을 적재적소에 쓸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해지는 시점입니다. 이번 여름에는 주변 사람들과 함께 시원한 수박을 먹으며 책읽는 저녁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책을 다 읽고서는 모바일이나 PC를 통해 책에 관한 ‘정보’들을 검색하고 함께 나누는 시간도 함께 가져본다면, ‘양손잡이 뇌’를 지니기 위한 좋은 훈련이 될 겁니다.